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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
인생을 살다보면 도저히 이해 안되는 일들이나 사람들을 만나보셨을 겁니다. 그게 실은 자연스러운 현상이 아니라 전부 악귀가 벌인 소행이라는 거, 알고 계셨나요? 저승으로 인도된 영혼들은 머물던 자리에 이루지 못한 깊은 한을 남기고 갑니다. 보통은 자연스레 사라지지만, 간혹 사라지지 않고 다른 것을 끌어들이며 그 자리에 오랜 시간 고이면 그것은 악귀가 됩니다. 그렇게 생겨난 악귀들은 이미 우리의 삶에 너무 많은 관여를 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저희 주술사 협회 **'저주록(詛呪錄)'**에서는 조용히 악귀들을 처리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일반인들까지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어서 곤란해진 상태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은 저희를 도와주실 수 있는 힘을 지녔기에 저희와의 연이 닿은 것 같군요. 당신도 이 기이한 연을 느끼셨다면 부디 끝까지 따라와 주시길 바랍니다.
저주
저주에 대해서 자세히는 모르시더라도 살면서 한 번쯤은 들어보셨을 겁니다. 어쩌면 가볍게, 또는 무겁게 그 말의 뜻을 이해하고 이미 실천해보셨을 수도 있겠네요. 근데 사실 저주의 대상은 사람을 향해서 해야 하는게 아니란 걸 알고 계셨나요? 저희는 이 저주로 악귀를 상대해야 합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들을 보고 직접 해를 가하여 청소하는 일은 이 저주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죠.
저호석(詛壺蜥)
저호석은 저희가 이 귀여운 녀석들을 부르는 명칭이에요. 뭐, 사실 저호석보단 저주 도마뱀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긴 한데 그래도 전문적으로 보이고 멋있잖아요? ...아님 말고요. 저호석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해요. 우선 보름달이 뜬 밤에 수확한 조롱박을 산군이 허락한 냇물에서 깨끗하게 손질... 이건 넘어가고. 아무튼 저희가 조롱박으로 만든 호리병과 부적을 준비해드리니, 당신은 그저 마음에 드는 끈만 준비해오시면 돼요. 리본, 줄, 사슬, 구슬끈 등등 호리병을 묶을 수만 있으면 무엇이든 상관 없어요.
그럼, 이제부터 집중하셔야 합니다.
먼저, 새벽 1시에서 3시 사이, 그러니까 축시(丑時)에 저희가 드린 호리병에 여러분이 준비한 끈을 묶습니다. 그 다음으로 준비해드린 부적에 당신만의 저주를 적습니다. 한자로 당신의 저주가 될 단어를 적고 호리병에 얹으면 따로 붙이지 않아도 단단히 붙어 떨어지지 않는 걸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창문을 살짝 열고 호리병의 뚜껑을 연 채로 창가에 올려두신 후에 그대로 푹 주무시면 됩니다. 잠에서 깨어나신 후 호리병의 뚜껑을 닫고 호리병을 가볍게 노크하듯이 두드려보세요. 안쪽에서 두드리는 소리가 되돌아온다면 주술은 성공한 것입니다. 실패하셨다면 따로 저희에게 말씀해주세요, 호리병이나 부적을 잘못 준비해드렸나 확인하고 다시 도와드릴게요. 성공하셨다면 이녀석들이 뭔지,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알아가셔야 할 차례입니다. 저호석은 이제 당신이 책임져야 할 생명이자 파트너이니까요.
0단계, 呪(빌 주)
당신이 바라는 저주의 향을 맡고 찾아온 여린 혼입니다. 악귀와는 다르게 자연 속을 떠도는 자연스러운 혼이에요. 사람처럼 몸과 혼으로 나뉘는 게 아니라 혼의 상태로 자연적으로 생겼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존재들로, 우린 이 존재들을 호리병으로 붙잡아서 당신과 인연을 이어 이 땅위에 뿌리를 내리고 당신의 짝으로서 살아가게 할 거예요. 작은 도마뱀의 모습을 하고 있으며, 아직 대단한 힘은 없는 상태예요. 기껏 해봐야 생긴지 얼마 안된 악귀를 잡아먹는게 다죠. 아직 몸이 제대로 자리잡지 않은 터라 아주 말랑한 몸과 일렁이는 꼬리를 가졌고, 등에는 자신의 근원이 되는 당신이 정해준 저주의 단어가 새겨져있어요. 동공은 각자 특유의 색이 있지만 검은자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고 시야가 굉장히 넓은 편입니다. 발가락은 앞발 5개, 뒷발 4개로 도마뱀답게 벽도 잘 타고 목에는 호리병에 묶어두신 것과 같은 끈을 매고 있어요. 몸은 보드라운 털이 가슴께에 복실하게 자라있고 몸 전체는 짧고 부드러운 털로 덮여있으며, 염소나 소와 비슷한 귀를 가졌어요. 0단계인 주의 상태에선 약한 악귀들을 먹여 아직 연약한 형태의 저호석을 단단히 자리잡을 수 있게 도와주셔야 해요. 한마디로 열심히 먹고 자라야 하는 때라는 거죠.

1단계, 蜴(도마뱀 척)
필요한 만큼 악귀를 먹고 혼이 단단해진 저호석은 사흘쯤 잠에 들 거예요. 그렇게 긴 잠과 영혼의 탈피를 끝낸 상태가 바로 1단계, 척의 상태입니다. 이젠 제법 몸에 자리를 잡은 상태라 인면 도마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몸은 여전히 부드러운 털로 덮여있지만 얼굴은 매끈한 피부로 변했습니다. 일렁이던 꼬리끝도 좀 더 단단해지고 몸도 보통의 생명처럼 부드러우며 단단한 형태를 갖췄죠. 악귀를 열심히 잡아먹은 덕분에 지능이 생기고 사람의 형태를 조금씩 갖춰나가고 있으며, 저주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비녀처럼 뿔도 자라난답니다. 이렇게 자라난 뿔은 필요한 때에 뽑아서 사용하게 돼요. 뿔을 뽑는 것은 아프지 않답니다. 진짜 동물과 같은 뿔이 아니니까요. 저호석마다 뿔의 개수가 다를 순 있지만 능력에 차이가 나진 않고, 사용한 뿔은 또 금방 자라니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꼬리에 붙은 부적은 그날 필요한 양에 따라 달라지는데, 저호석마다 붙이고 다니고 싶은 곳에 붙이고 다닌답니다. 1단계, 척의 상태부턴 사람 몸 속에 숨은 악귀를 찾아낼 수도 있고 여러 저주술을 써서 악귀를 처리하거나, 악귀가 여러분에게 걸어오는 저주를 튕겨내고 되돌려 보낼 줄도 아는 나름 든든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쯤부턴 간단한 대화도 가능하고 당신과 이어진 인연이 확고하게 자리잡아 하늘의 신들도 이 인연의 실을 단단히 묶어줄 거예요.

2단계, 靈(신령 령)
많은 악귀를 상대하며 저주술을 익히고 꽤나 숙련됐다고 생각될 때쯤이면 저호석은 스스로 더 강해질 필요성을 느낍니다. 악귀들 사이에서도 소문이 나 자칫하면 당신까지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죠. 저호석은 다시 호리병 속에서 마지막 탈피를 하게 되는데, 그 기간은 약 한 달쯤 걸리며 그동안 당신은 저희쪽의 주술사들이 보호해드릴테니 악귀로 인한 위협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 한 달의 탈피를 마친 저호석은 이제 0단계, 1단계의 모습도 자유롭게 오갈 수 있습니다. 2단계, 령의 상태는 저호석의 최종 성장의 모습으로 인간과 거의 흡사한 모습을 가집니다. 키는 인간과 비슷하게 평균 170cm의 신장을 가지면서 개체에 따라 좀 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한 편입니다. 털이 덮여 보드라웠던 피부는 이제 매끈하고 군데군데 비늘이 돋아 반짝입니다. 2족보행을 하는 두 다리는 도마뱀처럼 비늘로 덮여있고 포유류와 인간의 형태가 적절히 섞여있습니다. 길고 튼튼한 꼬리는 더이상 일렁이지 않고 단단히 자리잡아 균형을 잡거나 공격을 하는데 이용되기도 합니다. 손바닥과 발바닥엔 도마뱀처럼 선명한 지문이 자리잡고 있어서 벽을 타는 것도 무리가 없습니다. 물론, 조금 영적인 힘도 동반되기에 천장에도 쉽게 매달리는 걸 보실 수 있을거예요. 등에 있던 저주의 단어는 눈 아래로 옮겨졌으며, 제대로 평범한 사람정도의 지능을 갖춰 대화도 매끄럽게 이어질겁니다. 이젠 당당히 당신의 짝이자 동반자로 자리했다고 말할 수 있겠죠. 령의 상태가 된 저호석은 저희 저주록에서 의복을 지원하고 있으니 옷에 대해선 걱정 마시고 편히 연락 주세요.

수명
저호석은 당신과 만난 날부터 당신의 죽음까지 함께 합니다. 흘러가며 순환을 반복하는 영혼 중 하나를 당신의 운명에 묶어 실체를 갖도록 만든 존재이기에 당신과 수명을 공유하고, 당신의 수명이 다하면 그들은 다시 혼의 상태로 돌아가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어쩌면 당신과의 또 다른 만남을 기대하며 계속해서 순환해가겠죠. 악귀와 싸우다 크게 다친 경우 죽진 않고 연기처럼 흩어져 호리병으로 되돌아갑니다. 한동안 회복의 시간을 가지고 다시금 당신에게 나타나 보일테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물론, 걱정해주시면 그들은 기뻐할겁니다.